김희정의 아버지 역할

이영준
이미지비평 /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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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아버지는 강하다. 그러나 강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name of the father)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은 사회 구석구석에 복제되어 있다. 사장님의 이름, 선생님의 이름, 지휘관의 이름 등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일반적인 이름이다. 강한 아버지에 대해 작업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아버지에 대해 작업하는 것이다. 물론 김희정의 아버지 작업은 자신의 사적인 특정한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작업노트에서 김희정은 아버지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다고 했다. 일반적인 아버지는 싫어할 수 없다. 자신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아버지는 싫어할 수 있다. 물론 좋아할 수도 있다.

 김희정의 아버지는 영웅소설에 나올 법한 가난을 딛고 일어선 성공의 주인공이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건설의 주역들이며 불사불멸의 존재라는 일반화된 틀의 화신이다. 그런 아버지는 김희정의 아버지를 떠나서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상징질서의 일부가 되었으며, 김희정은 자기가 거리감을 느끼는 아버지가 개별적인 아버지인지, 상징질서로서의 아버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아버지는 상징질서 속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이 사진으로 나타난 것이 김희정의 작업이다.

 그런데 Ultra Super Powerful Father 시리즈에서 김희정 자신이 아버지로 분장하고 나온 그 사진들에서는 뭔가 더 애틋한 냄새가 난다. 거리는 느끼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안타까운 아버지. 이름으로만 남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는 그런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 묻기를 그만두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아버지의 이름뿐이니까.
남의 개별적인 아버지에 대해 안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모르되, 모든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아버지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파악하는 방법과 양상이 다 다르므로,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운수에 관계된 일이다.

 입지전적 성공의 주인공이며 한 딸의 아버지인 Father는 시골에서 힘든 일을 하며 청춘을 보내다가 상경하여 공장 사무실에서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항상 국기에 대한 경례 때는 경건한 자세로 애국가를 끝까지 듣고는 집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인테리어 속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어디에나 있는 아버지이다.
그 전에는 김희정은 Kim-Chi라는 시리즈를 통해 김치 만드는 어머니의 측은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측은한 이유는 김치를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을 위해 만들기 때문이다. 힘겹게 만든 김치를 양 손에 싸 들고 뉴욕 공항에 내린 어머니를 김희정은 사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김치는 다른 사람을 향한 김치였으나 막상 그 김치가 내포하는 사랑의 지향점인 김희정은 그 사랑을 느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김치를 매개로 한 어머니의 사랑은 분명히 이타적인 것이나, 그 이타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그 사랑의 수혜자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머니의 구조이고, Kim-Chi 시리즈가 말하는 바이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랑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방적인 것이긴 하지만, 김희정의 작업이 그런 사랑에 대해 거리를 두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그들의 페르소나에 개입시킨다. 아마 이 작업은 두 가지 층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김희정 자신과 아버지, 어머니와의 동일시다. 그러나 아무리 동일시하려고 한다고 해도 결코 그들은 같아지지 않는다. 겉으로 의식되는 거리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 김희정은 서로 별개의 존재이며, 차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희정 자신은 젊을 적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긴 외모를 지녔다. 그래서 위와는 약간 다른 층위에서, 김희정과 아버지는 같은 사람이라는 도플갱어의 역할을 맡는다. 그것은 신디 셔먼의 작업에 등장하는 셔먼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셔먼 자신은 자기 작업이 셀프 포트레이트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셔먼의 얼굴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녀 작업에서 중요한 축이다. 즉, 이미지로 표상되는 나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미지를 나라고 인정해주는 상징질서의 코드는 무엇인가? 그 코드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 잡아서 이미지를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가? 등등의 물음이 그 축을 따라서 회전하고 있다.

 김희정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버지와 닮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와 아버지를 닮고도 다르게 만들어주는가? 얼굴 자체의 물리적 형상의 닮음과 차이인가, 혹은 얼굴을 인식하는 문화적이고 관상학적인 습관에서 오는 닮음과 차이인가? 이 질문 속에 김희정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의 근거가 들어 있다. 만약 아버지가 전혀 나와 상관 없는 인물이었다면 닮든지 안 닮든지, 그게 어떤 집안 출신이고 어떤 경로를 거쳐서 성공했는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즉 아버지의 이름은 나에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가 이름이 아니라 어떤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물 속에는 나도 들어 있다. 그 '나'를 찾는 것이 김희정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