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의 Family와 Pink & White

박찬경
작가

 
  KR EN

김희정의 최근 작업 Family를 보면서, 그동안 한국의 사진에서 '재연'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디 셔먼의 Untitled Film Stills 이래 또 현대미술에서 '전용(appropriation)'이 일반적인 방법이 된 이래, 재연 사진은 국내에서도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당히 많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 방병상이나 조습의 작업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재연 사진의 제작 의도가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이 들 작업은 유사한 미학적인 목표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희정의 Family에서 보이는 것처럼, 장면의 '재코드화'이다.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따르자면 '신화의 재신화화'이다. 바르트는 '신화의 재신화화'를 통해, 신화의 특성인 '역사의 자연화'를 다시 역사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진은 역사적으로 부여되는 의미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의미구조를 거부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냄으로서, 수용자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신화를 신화의 형식으로 되돌리는 것이 중요하며, 자연적으로 보이는 형식을 다시 인위적이고 의미화된 '인위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탈신화화의 형식이 요청된다.

 최근의 논의는, 대체로 신화의 재신화화, 재약호화 등이 과연 이미지의 끝없는 난반사와 '재신화화의 신화화'속에서, 얼마나 효용을 지니는가에 대한 의문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서 배우들이 연예계를 일상적으로 실황 중계하는 문화 속에서, 영화나 광고가 상품을 팔기위해 코드화된 것이라는 것을 관객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바르트의 60년대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하냐고 물을 수 있다. 아마도 같은 의미에서, 처음에 신선해 보였던 재연의 방법이 지금에 와서도 애초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희정의 작업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에 더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신화의 체계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신화를 신화로 소비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변의 삶이나 개인의 역사가 값싼 휴머니즘을 넘어서 재현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김희정의 작업이, 애초부터 어떤 비평적인 목적을 지니고 가족이데올로기를 탈신화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쓴 글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김희정은,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온 것이 무엇인지 묻고자 했고, 그것이 재연과 연기를 사용한 가족의 탈신화화로 결과했다. 특히 이전에 했던 Pink & White가 색채상징에 깃든 문화적 편견들에 관한 것이었던 데 비하면, Family는 그러한 넓은 의미의 추상적인 접근이 나타내는 시각적 세련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허접한' 현실성에서 출발하려는 의지를보인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김희정 세대의 작가가 '아버지(연기)'를 통해 개인사와 사회사의 뒤얽힌 구조를 탐색하려는 것 자체가 용감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초면에 아버지 직업을 묻는 실례를 범한다고들 하는데, 사실 한국사회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무례는 상당한 정확성의 대가로서 적어도 효율적인 질문이기는 하다. 최근 조해준의 놀라운 아버지라는 작업이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김희정의 아버지의 사회사도 국가가 주도하는 폭력적인 한국현대사와 완전히 달라붙어있다. 김희정의 Family에서 아버지는 반드시 김희정의 아버지가 아니어도 될 정도로 '전형화'되어있는, 실제로는 가족 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유명론적' 존재로 묘사된다. 아버지, 또는 김희정이 연기하는 아버지는 애국가에 맞춰 기립하고 있을 때나 TV를 보고 있을 때나 가족 보다는 국가와 이어져있다. 가족, 동네, 직장은 국가의 하부단위로 국가와 어색하게 결합된 '자치단체'같다.

 Family에서 Father 시리즈와는 달리, Kim-Chi와 Little Princess는 사회상의 묘사보다, 심리 상황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머니와 며느리,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은 약간 엽기적인 소극의 형식으로 코믹한 광기를 보여주는 것에 비해, 아버지의 상황은 비교적 객관적인 정황묘사로 기울어있다. 말하자면 자신을 포함해 가족 안의 여성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이 상당히 몰입되어 있는 반면,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끼어들 틈이 없는 더 막막하고 생경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아버지로 연기하는 것과 어머니로 연기하는 것은 단순히 롤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태도나 동기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는 소극적인 대체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연출이 된다. 이 작업의 재미는, 각각의 사진이 연출된 방식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연출할 때와 어머니를 연출할 때, 국가를 연출할 때와 가족을 연출할 때의 차이를 비교할 때 생겨난다.

 만약에 어떤 일반화된 미학적 잣대로 김희정의 작품을 평하자면, Pink & White가 제작시기가 겹치는 Family 보다 더 세련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노골적인 로우-테크 비디오인 Ultura Super Powerful Father같은 작업은 Pink & White의 섬세한 기호조작능력과 사물을 다루는 솜씨에 비하면 아예 다른 작가의 작업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작가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연구하기위한 일종의 계획된 '후퇴'를 감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덕으로 생각된다. 사실 '후퇴'로 표현한 이것은 하나의 피드백구조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Pink & White에서 남성성/여성성의 이원성을 사용하면서 단순한 사물과 감각에조차 스며들어있는 문화적 강제들과 자동적으로 개입되는 주관의 성적 편향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Pink & White에서 아이스크림과 비스켓, 계란과 우유등은 순결, 유약함, 성스러움, 욕망 등의 상징체계이다. 초현실주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성적교란과 신성모독의 '위트'들이 이 작업에서 반복된다. 그 중에서도 이 연작의 백미는 White #8이다. 신데렐라 '입체' 동화책에서 팝업된 신데렐라 종이인형은 흰색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있는데, 흰색 페인트의 거의 포르노그래피적인 '과잉'은, 행복한 결말로 가는 동화 내러티브의 중단만이 아니라 동화 형식 자체의 좌절을 의미한다. Pink #8이 성모상의 형태를 남근의 형태로 전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데렐라 동화 역시 일종의 신성모독이면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표면의 정치학을 순간적으로 뒤집어버린다. 따라서 White #8은 Family의 다소 코믹하고 살짝 '맛이 간' 국면들과 연결고리를 이루는 것 같다. 여기서는 Family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성하고 행복하고 달콤한 것에 대한 갑작스러운 모욕과 혐오감 등이 '팝업'-불쑥 튀어나와있다.

 작가가 명백하게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조용하지만 전복적인 Pink & White 연작과 Family 연작의 사이에서도 이러한 교차와 뒤집기의 관계가 존재한다. 눈에 띄게 보이는 형식의 차이만이 아니라, 작업의 충동이랄까 작업에서 나타나는 관심의 초점이 그러하다. 두 작업 모두 성과 연령의 혼란이 존재하는데 (Family의 경우에는 아버지로 연기하는 나, 남성 같은 어머니, 아이의 성적 환상 등), Pink & White는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애매하게 나타나고, Family에서는 구체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사건(Family)과 그것의 추상화(Pink & White)처럼, 또는 대체(Family)와 압축(Pink & White)의 관계처럼, 두 개의 작업이 서로를 구조적으로 지지해준다. 따라서 김희정의 두 작업은 형식이 전혀 다르지만, 나란히 놓고 볼 때 더 흥미롭다.

 김희정은, Family작업을 통해 자신과 가족, 가족과 사회의 관계로 관심을 돌리면서, Pink & White가 지닌 추상성을 극복하려고 한 것 같다. 주제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들을 시도하고, 그런 서로 다른 시도를 오히려 충돌시키는 작가의 대담성이 지금의 젊은 작가들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가 김희정 세대의 많은 작가들에서, 이미 어떤 정형화된 스타일을 반복하는 것을 흔히 보고 있다면 말이다.